Philanthro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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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하고 올곧은 한 그루의 APA 나무를 심는다는 마음으로
지금부터 당신과 함께 APA 6번째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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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소희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배를 받은 어민들이 엄지를 치켜들면서 고마워했어요. 그분들이 좋아하니까 저도 많이 기뻤어요.”
    2015년 당시 고등학교 3학년 이었던 김소희 양은 ‘캄보디아의 어려운 가정에 배 보내기’ 프로젝트를 스스로 기획하였다. 직접 기획한 이 프로젝트가 현실이 되려면 자금이 필요했다. 그녀는 네이버 해피빈 모금에 자신의 계획을 올렸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지지를 보내주었다. 어린 소녀의 뜻에 동참하겠다고 자신의 돈을 기부하고 나선 사람만 총 460명이 되었고 모금액 300만원이 만들어졌다.

    그녀는 이 돈으로 4척의 배를 캄보디아의 가정 형편이 어려운 어촌마을의 가정 4곳에 기증하였다.
    19살의 어린 소녀가 이끈 변화는 캄보디아 어촌 마을의 4 가정의 자립을 도왔을 뿐 아니라 수백명이 넘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원하면 이룰 수 있다’라는 희망을 보여주었다.

    확실히 변화를 이끄는 이러한 행동은 쉽지 않다. 보통 사람들과 다른 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그는 문제집보다 불우한 이웃을 바라보았고 틀린 문제의 정답을 맞추기 보다 불쌍한 주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섰다. 고등학교 3학년 밖에 되지 않는 학생이 300만원이란 거금을 모아 한국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던 이유에는 이렇게 어릴 때부터 남달랐던 나눔에 대한 그녀의 관심 덕분이었다.

    또한 학교에서는 재학생과 교직원들이 참여하는 ‘나만세프로젝트(나눔으로 만나는 세상)’를 분기별로 전개하여 기증품을 모아 굿윌스토어에 전달하고, 전교생을 대상으로 나눔교육이 만들어지도록 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행보는 한국스카우트연맹의 실천사례로 선정되어 교육 자료로도 활용되었으며, 각종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오랜 기간 타인을 돕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해 발로 뛴 김소희 양은 ‘적정기술’에 관심이 많다.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이란 그 기술이 사용되는 사회 공동체의 정치적, 문화적, 환경적 조건을 고려해 해당 지역에서 지속적인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기술로, 인간의 삶의 질을 궁극적으로는 향상시킬 수 있는 기술을 일컫는다. 적정기술을 활용하는 환경 전문가가 되어 해당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에너지를 개발해 그 지역의 경제 자립을 돕는 것이 김소희 학생의 꿈이다.
  • 수카와티 재단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이 단지 지원을 받는 삶이 아닌, 스스로 지속가능한 삶을 꾸려갈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우리 재단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Q : 네팔의 Sukhawati 재단 창립 동기 및 목적에 관해 이야기 해 달라.
    한국에 머무는 동안 저는 아름다운재단에서 기증받은 물품들을 팔아 자선기금을 모으는 매장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곳은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이상적인 사회적 기업이었다. 그 덕분에 2012년 모국 네팔로 돌아왔을 때 저의 고국에서 그와 같은 곳을 창립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옷 같은 것도 네팔의 많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나는 옷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계절에 맞는 의류를 제공하는 것은 더위와 추위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인류에게 커다란 봉사이다. 우리의 경험에 따르면, 옷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품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보다 명목상 저렴한 가격으로 그런 것들을 제공하게 되면 받는 이들로 하여금 그들의 자존감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나는 팀원들과 제가 가진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의류 및 사용하지 않은 새 상품의 물품을 기부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음식을 제공 할 수 있는 자선 활동에 관해 이야기 해주었다.

    처음에는 거리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그 후에는 이사회 멤버 중 한 곳의 차고에서 판매 상점을 운영하게 되었다.
    우리 고객들은 우리에게 정식 판매 매장을 설립하는 것을 권장해주었고 고생 끝에 우리는 매장을 차릴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몇 시간 만에 팔십 달러 가치의 여러 상품들을 팔 수 있는 그런 매장이 되었다. 현재 Samakhoshi에 우리 매장이 위치해있으며 카트만두는 여러 시련의 단계를 거쳐 저희 매장을 차릴 수 있게 되었다.
    Q : Sukhawati 재단에서 진행 중인 주요 활동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
    Sukhawati 재단에는 두 가지 주요 프로젝트가 있다. 하나는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의 생계를 위한 프로젝트이며 다른 하나는 재사용 가능한 물품을 판매하는 매장이다. 생계와 관련한 프로젝트에서 우리는 Dakshinkali Municipality-9의 Talkhu와 Gorkha의 Thalagung Village에서 “Namaste Agriculture Project”라는 농업을 가지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야채 및 농작물을 홍보하여 수입을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한 지역 사회 사람들의 영양을 보장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우리는 그 지역 여성 단체 및 협동조합과 긴밀하게 협력하며 프로젝트 수행해 왔다. Sukhawati 재단은 채소 재배, 양수 관개 지원, 통합 해충 관리, 폐기물 관리, 수자원 관리 훈련 및 식물 특정 훈련에 대한 교육을 제공한다.

    현재 약 250명의 여성이 생계 사업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 이제 그들은 독립적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판매 매장의 경우, 3명의 직원 및 4 명의 자원 봉사자를 통해 운영되고 있다. 우리는 가정용으로 사용되는 의류 및 제품을 제외한 재사용이 가능한 모든 연령대 및 성별의 물품을 판매한다. 매년 우리는 약 4000달러 가치의 2톤의 재사용이 가능한 옷을 판매한다. 이는 환경오염을 줄이는 데에도 기여한다. 또한 이 프로젝트를 통해 월 100-150달러의 수입으로 기본적인 생활물품을 마련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옷과 가정용품을 제공한다.
    Q : Sukhawati 재단은 어떻게 독특한 사회적 기업이 되었는지?
    농업과 관련하여 우리는 토착 기술 및 제품을 홍보하고 지역 주민 및 협동조합과 협업하며, 가장 중요하게는 네팔의 농촌 지역 여성 단체들에게 권한을 부여한다. Sukhawati 재단의 의류 매장에서는 루피 10에서 250 사이의 가격대에서 제품을 판매한다. 이를 통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도 쉽게 매장에 와서 옷을 구입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자원 봉사자가 중심이 되는 단체이며 네팔 카트만두의 어린이 및 노인 대피소에 현금과 농산물을 제공하고 있다.

    Q : 아시아 필란트로피 어워드에서의 수상은 Sukhawati 재단 및 재단 회원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나?
    이런 권위 있는 상을 수여받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이 상은 네팔 내외의 사람들과 조직들의 규모 및 영역을 확대 시키게 해주었다. 또한 회원, 직원 및 자원 봉사자가 활발히 봉사 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 해주었다.
    Q : 앞으로 극복해 나가야 할 주요 과제는 무엇인가?
    네팔에는 사회적 기업을 위한 구체적인 정책이 없다. 사기업 및 사회적 기업 모두 동일한 조건 하에서 정책이 적용 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정부 측으로부터 이끌어 와야 할 등록, 세금, 감사, 갱신 및 감독에 관한 여러 극복해야 할 과제를 가지고 있다.

    Q : 어떻게 아시아 필란트로피 어워드에 관해 알게 되셨나요?
    A): 2015년 네팔의 지진 피해자들에게 구호 물품을 전달하는 저희 재단을 본 한국인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의 노력에 감사를 표하며 2018년 아시아 필란트로피 어워드에 지원하기를 것을 권유했다.
    Q : Sukhawati 재단의 향후 계획은 무엇인가?
    빈곤 퇴치를 위한 시범 사업이다. 우리의 계획과 영향력을 유지할 협동조합 및 지역 사회 단체와 협력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우리 재단이 운영하는 프로젝트를 최소 비용으로 네팔의 다른 지역에서도 구현할 수 있다.
    향후에는, 네팔 전역에서도 유명한 대부분의 농산품을 공급하는 Sukhawati 매장을 만들고 싶다. 또한 네팔에서 이상적인 사회적 기업으로서 더 전문화되기를 원한다.

    Q : 마지막으로 대중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신지?
    네팔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권한을 부여하는 일을 하고 있는 저희 Sukhawati 재단과 함께 해주시기를 바란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 승일희망재단
    “기부라는 것이 나보다 어려운 누군가를 돕는다는 의미를 벗어나, 내가 행복해지는 일이라는 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몸과 마음으로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 말할 수도, 숨 쉴 수도, 사랑하는 사람을 안을 수 없다. “그래도 난 살아있다.”
    2011년에 설립된 승일희망재단은 루게릭병을 이해하고 체계적으로 간병할 수 있는 루게릭 요양 병원 건립이 최우선 목표다. 또한 루게릭병 환우와 가족들의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 다양한 지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시련 속에 찾아오는 선물, 아이스버킷 챌린지 “재단 운영의 대한 지식을 전혀 모른 채 시작했다. 꿈과 열정으로 시작한 것이다. 현실의 벽을 마주한 순간마다 선물이 나에게 찾아왔다. 릴레이 기부 캠페인 ‘아이스버킷 챌린지’가 저에게 선물 같았다. 찬 얼음 물을 한 번에 쏟아붓고 3명의 지인에게 지목하는 SNS 캠페인을 션 대표님 1명의 시작으로 유명 스타들이 함께 참여해주었다. 결국 2018년 9월 15일, 918명이 동시에 참여하는 아이스버킷 챌린지 행사도 할 수 있었다. 기적과 희망이 저에게 조금씩 다가오는 일이 된 것 같았다.”
    삶이 지속되는 한 희망은 있으니 마음까지 닫지 마라, 삶이 아무리 불행한 것 같아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 스티븐 호킹(Stephen William Hawking) 박사 -

    승일희망재단 로고는 루게릭병 환우를 위한 캠페인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기념하며 항상 응원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제작되었다. 나선형의 선은 물이 쏟아지는 순간으로 아이스버킷을 뒤집어쓴 사람의 모습을 상징한다. 동시에 어깨동무한 사람의 모습을 나타내며, 이는 마음을 함께 한다는 의미를 표현이다.
    희망의 끈을 이어갑니다.
    “재단 직원들의 평균 나이는 30대 초이다. SNS으로 활발히 많은 후원자 및 관심 가져주시는 모든 분들과 소통하고 있다. 젊은 직원들이 힘써준 결과인 듯 하다. 기부상품을 판매하는 승일희망재단 기부상품 공식 쇼핑몰 ‘위드 아이스’도 젊은 직원들이 함께 하고 있다. SNS의 게시 글에도 내가 소소히 소통하려 하는데 종종 젊은 직원이 글귀를 고쳐 주곤 한다.”

    든든한 지원군과의 동행 2016 APA 올해의 NPO 수상
    “수상 받는 2015년, 2016년에는 승일희망재단이 알려지지 않을 시기였다. 추천을 받고 수상이 되었다는 소식에 재단의 활동을 자세히 알고 계신 분께 놀랐다. APA의 많은 전문 심사위원의 참여와 공정성에 두 번 놀라게 했다. 나에게 선물같이 다가왔다. 그리고 상금이 없어서 더욱 자랑스러웠습니다. 수상을 받고 난 이후 승일희망재단을 이야기할 때 APA 수상 이야기는 빼지 않고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전문가의 평가와 공정성이 승일희망재단에 증명되는 수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부적으로는 수상의 기준이 승일희망재단의 기준이 되어 자긍심을 가지게 되었고, 운영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공정성과 투명성에도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어느 활동을 할 때마다 든든한 느낌을 받곤 한다. 작은 재단에 큰 힘이 된 APA 수상, 앞으로의 APA 활동에도 응원할 것이다.”
    Dreamer. 꿈꾸는 사람들
    작은 병실에서의 꿈, 그 꿈은 작은 꿈이 아니었다. 루게릭병 환우와 가족들을 위한 병원 건립의 꿈을 이야기하고 응원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꿈은 너무 커서 가능할까 하는 작은 마음이 있었다. 혼자의 생각이 아닌 함께 모여 여럿이 모두의 꿈이 되었다. 병원 건립을 위한 토지를 구입했다. 사용하는 환우, 가족, 간병인 모두가 편히 이동할 수 있는 위치를 고려했다. 아직 병원 건립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꾸준히 함께 이루어 가길 희망한다. 모두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고 기쁨이 공존하는 공간을 건립하는 것, 존재만으로 힘이 될 수 있는 병원을 희망하고 있다.
    운동신경세포가 마비되는 루게릭병은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불가능한 것들은 점점 많아진다. 하지만 생각은 할 수 있다. 생각하는 힘만으로도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희망을 품은 승일희망재단. 그 희망을 응원하고 실현될 수 있기 위해 승일희망재단이 존재한다. 2016년 올해의 NPO 상을 수여받은 승일희망재단의 앞날을 기대해본다.
  • 스마일재단
    “장애인이 편하게 부담 없이 오고갈 수 있는 그런 치과. 비장애인들이 흔히 접할 수 있는 병원을 장애인들에게도 누리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2월 22일 스마일재단의 시작
    1년 365일 중 숫자 2가 가장 많이 들어가 있는 날, 치아의 날이라고 해도 될까? 2003년 2월 22일 창립총회를 시작으로 스마일재단은 시작되었다.

    - 김건일 이사장: 비장애인들도 병원 중 치과를 특히 무서워하는 성향이 있다. 장애인은 더욱 더 심하게 무서워한다. 장애인에게 치과 치료는 시간은 2배로 들어가고 노력은 3배 더 들어가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장애인들은 치과에 가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와주고자 하는 게 저희 스마일재단의 작은 마음이다. 치과의사 10명이 모여서 시작해서 16년째 활동한 스마일 재단. 저소득층 장애인 지원 사업도 중요하지만, 비장애인, 장애인 모두가 가지고 있는 장애인 인식 개선 사업도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나성식 명예 이사장: 어느 날 정기기부 5천 원이 등록되었다. 감사 인사를 드리며 후원 참여 사유의 대하여 문의해보니, 사실은 지원받으신 저소득 장애인 분이셨다. 내가 이렇게 지원받았는데 할 수 있는 만큼 후원해주시는 것이라고 답변 주시는데 작게나마 눈물이 나오더라.
    작은 회의실 한편에 빼곡히 쌓인 서류
    - 나성식 명예 이사장: 보철 치료 지원 신청서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아두고 있다. 100개의 지원서가 들어오면 90개는 지원을 받지 못한다. 모든 분들을 지원 드리지 못하여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소중히 써주신 지원서인데 왜 못 받으셨는지조차 답변을 드리지 못하면 안 되겠다는 마음에 모두 모아두고 문의가 있으면 하나하나 안내해 드리고 있다.
    - 김건일 이사장: 사회에서 근무도 하고 재단도 운영하는 일은 체력적으로 힘겨운 일이다. 그러나 더 힘든 건 모든 분들 게 지원해드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마음이 아파 더 이상은 심사에 참여하지 않고 다른 이사님들께 안내드렸다.
    - 김민경 팀장: 기금 지원 사업은 1차와 2차가 있다. 1차에 선발되셨으나 거부 및 연락이 닿지 않으면 2차로 넘어간다. 2차에 선정되신 분께 연락드리니 그 사이 돌아가신 분이 계셨다. 조금 더 일찍 지원에 연락을 드렸다면 건강이 유지가 되어 조금은 웃고 계시지 않으셨을까 했다. 짧은 6개월의 기간이다. 작은 지원 사업이나 더욱 책임감을 가지고, 신중하게 일하고 있다. 지원 받으신 많은 분들이 종종 감사 인사 전화를 주신다. 우리가 흔히 먹을 수 있는 고기, 김치를 이제는 아삭아삭 드실 수 있다는 환영의 소식을 한통 주시면 더욱 더 힘이 나곤 한다.
    APA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시는 나성식 명예이사장
    APA 수상은 우리에게 있어 명예를 받은 듯 했다. 상금이 없는 시상식이라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자연스럽게 명예를 알리고, 떳떳하게 지원 사업 안내하며, 모금 요청을 드릴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기금 모금이 증진하게 되었다. 기금 모금이 되었다는 것은 지원 사업이 증가하며 저소득의 장애인이 지원을 받는다는 의미다. 우리의 꿈이 한 뼘 자란 일이다. 수치상으로 나와있진 않지만 APA 수상은 내부적 동기부여와 외부적 모금에 긍정적인 영향에 한 발 도움을 주었다.

    스마일이 여는 세상
    한국 장애인의 치과 첫 방문 나이는 14.7세, 옆 작은 나라 일본의 경우는 1.8세입니다. 간단한 조사를 봐도 한국 장애인의 치과 치료 상황을 알 수 있다. 첫째로는 장애인 인식개선이 매우 중요하며, 두 번째로 장애인을 위한 치과가 없다는 것이다. 두 가지의 불편함을 조금씩 바꿔가고 있다. 어린 장애인들이 뛰어놀며 치료받을 수 있는 공간, 교통시설이 잘 되어 있는 공간에 있는 병원, 비 장애인들은 흔히 접할 수 있는 병원을 장애인들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다.
    모두가 함께하는 스마일재단
    매월 1회 스마일재단 소식지가 발송된다. 혼자의 힘이 아닌 모두의 힘으로 만들어 제작하는 소식지. 소식지의 가치는 천만 원 이상이라고 이야기하는 나성식 명예이사장. “그들의 마음과 시간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천만 원 그 이상의 가치가 아닐까?” 그들이 있는 곳에는 그들이 만든 스마일이 있다.
  • 이광재
    “기부가 하나의 일상이자 기업 문화로 정착되어, 기부를 받는 사람뿐이 아닌 기부를 하는 개인이나 조직의 삶도 함께 변화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Q : 본인 소개 부탁드린다.
    제 1 회 아시아 필란트로피 어워드에서 올해의 펀드레이저상을 받았던 사회복지사 이광재이다. 당시에는 아픈 아이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는 한 단체의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장애 없는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사회복지법인 따뜻한 동행에서 상임이사 일하고 있다.

    Q : 어떤 계기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첫 시작 하였는가?
    유년 시절에 누군가를 돕는 것이 참 보람된 일이라는 것을 막연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늘 베푸는 삶을 살고 싶었던 나는 청소년기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많은 고민을 하였다. 그러던 중 학력고사를 100일정도 앞두고 “과부와 고아를 돌보는 삶”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되었고, 사회복지를 전공하게 되었다.사회복지를 공부하면서 제가 가장 잘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검증하고 싶었는데, 자원봉사 활동을 하며 확신을 갖게 되어 졸업과 함께 모금을 하는 사회복지사로 시작하게 되었다.
    Q : 남을 돕는 필드에서 활동한 기간이 오래되었다. 활동을 꾸준히 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가?
    20년이 조금 넘었다. 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을 도왔던 일들은 전혀 특별한 것이 없었다. 단지 다른 사람들처럼 일상생활 속에서 자리를 양보하거나 짐을 들어드리는 일 그리고 길을 잃으신 분들에게 안내해 드리는 일과 같이 아주 작고 소소한 일들을 할 뿐이다. 기부 역시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처럼 제가 생각하는 가치 있는 일들을 위해 작은 나눔을 실천하고 있을 뿐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20년 이상 현장에서 일할 수 있었던 힘을 생각해본다면, 끊임없이 우리사회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과 그로 인한 사람들의 필요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필요를 채워주고자 문제 해결 방법을 찾다 보면 내가 알지 못하던 많은 분들이 자신의 필요처럼 나와 함께 해 주고 있었다. 그러한 많은 만남들을 갖다 보니 벌써 20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흘렀다. 돌이켜보면 자신의 일처럼 나누어 준 많은 분들과 그 분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지금처럼 꾸준히 활동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Q : APA 수상 이후 변화한 것이 있다면?
    벌써 5회라고 하니 상을 받은 후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제 삶에도 크고 작은 변화들이 있었다. 우선, 제가 상을 받는 날, 현장 학습을 내고 시상식에 함께했던 초등학생 아이는 중학생이 되었고 저의 일터도 바뀌었다. 또한 현장에서 늘 궁금해하던 비영리단체의 광고 메시지의 효과에 대한 내용으로 사회복지학 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러나 내가 가장 많이 변화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일을 처음 시작했던 첫 마음’을 기억하게 되었고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 년간 좋은 의도와 큰 성과를 내고도 현장을 떠나는 많은 분들을 봤다. 하지만 APA 상이 저에게 첫 마음을 간직하고 지킬 수 있도록 하였고 그래서 지금도 현장에서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지치기 쉬운 현장에서 처음주신 마음으로 지금도 일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생각한다.

    Q : 이광재 수상자님께 APA란?
    어린 시절 비를 맞고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께서 따뜻한 말씀과 함께 마른 수건으로 닦아 주셨던 기억이 있다. 저에게 APA는 조금 혼란스럽고 지쳐갈 때 “지금까지 아주 잘 해왔고... 앞으로도 잘 할꺼야.” 라는 따뜻한 격려였다.

    Q : 마지막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
    필란트로피스트 한 사람을 격려하는 일은 단순히 한 사람에게 상을 주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이 평생 만나게 될 수백, 수천의 사람들의 변화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해마다 APA를 통해 세워지는 필란트로피스트들은 수 많은 사람들을 세우고 그들은 또 다른 나눔의 기적들을 만들어 갈 것이라 생각한다. APA에서 하는 일들이 단순한 시상식이 아닌 매해 수 많은 사람들을 세우고 격려하는 일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부족한 저에게 멋진 상을 주신 APA 모든 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감사합니다.
  • 김이경
    “캠페인 기획을 펼치는 과정에서 누군가 우리와 함께 공감하고 동참한다는 것이 기적 같습니다. 지금도 여기저기서 이런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제게는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Q : 본인 소개 부탁드린다.
    월드비전 서울남부지역본부에서 후원개발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김이경 차장이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월드비전에서 17년간 근무를 하고 있다. 사랑의 빵 동전모으기, 기아체험24시간, 사랑의 동전밭, 사랑의 빵 나눔 단말기 등의 모금 프로모션을 기획하고 진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부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Q : 어떤 계기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첫 시작 하였는가?
    처음에는 막연한 생각으로 좋은 일,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전공을 사회복지학으로 선택했다. 처음에는 복지관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기 위한 준비를 했으나 우연한 기회에 월드비전의 후원개발 업무를 하게 되었는데 사회복지사의 마인드를 가지고 후원개발 업무를 하는 하루하루가 즐겁고 신기한 경험으로 가득했다. 그러면서 이 일이 적성에 맞다 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만족하면서 일하고 있다.
    Q : 남을 돕는 일에 활동기간이 오래되었다, 활동을 꾸준히 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가?
    꾸준한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변화를 경험’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도움이 전해졌을 때 그들의 변화된 모습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나눔을 실천한 사람들의 생각과 삶이 자연스럽게 물이 스며들 듯 삶 속에서 나눔의 소중함을 인정하며 아름답게 변화하는 모습을 봤을 때 그 감동은 그 어떤 것 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보람과 기쁨으로 선물처럼 힘을 주곤 한다.
    Q : 사회 활동을 하며 가장 인상 깊었던 일화는 무엇인가?
    몇 년 전 여러 사회복지법인의 담당자 회의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어떤 한 분이 저를 알아 보시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저는 그 분이 누군지 전혀 기억이 없었는데 그 분의 말이 “대학생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행사에서 차장님의 강연을 듣고, 행사에 참여하면서 많은 감동을 받아 복수전공으로 사회복지를 배웠고 지금은 이렇게 사회복지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 내가 경험한 것을 알리고, 우리가 하는 일들의 필요를 다양한 기획을 통해 펼치는 과정에서 누군가 우리들과 함께 공감하고 동참한다는 것이 기적과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여러 구석구석에서 이런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큰 감동으로 다가 오는 일화이다.

    Q : APA 수상 이후 변화한 것이 있다면?
    자신감이 더욱 충만해 졌다. 지금까지 인정과 보상을 받기 일한 적은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생각하지도 못한 APA 수상은 저에게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자신감과 믿음으로 밀고 나가라는 메시지와도 같다. 그래서 수상 이후에 더욱 많은 새로운 기부문화 창출을 위한 아이디어와 도전을 이전 보다 열심히 추진하고 있다.
    Q : APA 는 어떤 의미인가?
    새로운 도전을 꿈 꿀 수 있게 도와준 선물이다. 자칫 지금까지 하고 있었던 일들에 안주하며 어느 정도 만족하며 지낼 수 있었던 저에게 머물지 말고 새롭게 도전하라고 응원해 주는 인생의 소중한 선물과 같았다. 매번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기에 감격하며 감사했던 지난 시간들도 다시금 생각나게 해 주었고, 앞으로 더 많은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기도 했다. 정말 인생에 있어 최고의 선물이다.
    Q : 마지막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
    우리가 함께 살아 가고 있는 이 사회에서 정말 귀하고 보석 같은 헌신의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고 계신 수 많은 동역자들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동역자들로 인해 우리의 세상은 지금보다 더 아름답게 변화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때로는 힘들고 억울하고 외롭다 느낄 수 있으나 언제나처럼 사명 앞에서 넉넉히 이기며 전진하는 그 모습을 함께 걸으며 응원할 것이다. 사랑한다.
  • 이동한
    “장애를 겪은 저는 ‘어떻게 살지’가 언제나 고민이었습니다. 다른 장애인 분들도 저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본능적으로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결심이 생겼습니다.”
    Q : 본인 소개 부탁드린다.
    사회복지법인 춘강을 운영하고 있는 이동한이다. 사회복지법인 춘강은 제주지역 최초의 장애인복지 전문법인으로서 1987년 설립되어 현재 장애인종합복지관 2개소와 직업재활시설 2개소 재활의원 1개소를 운영하고 있다.

    Q : 어떤 계기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첫 시작 하였는가?
    나는 2살 때 소아마비를 앓고 혼자 일어설 수 없는 중증의 장애를 갖게 되었다. 어머님의 헌신적 사랑으로 7살이 돼서야 지팡이에 의지하여 첫걸음을 떼었고, 학창시절 대부분을 수술과 재활치료로 보내야 했다. 긴 재활치료 속에서 나 자신에게 던진 화두는 “어머님이 안 계시면 어떻게 살지?”였다. 그리고 치료가 끝나자 바로 경제적 자립을 위한 준비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제주도 최초 계량기사가 되었고, 그 바탕으로 제주도 최초로 수도미터 계량기수리소 개업, 제주도 최초 조경건설업 면허로 지금까지 조경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나는 보조기에 의지하고 지팡이를 짚어야 걸을 수 있는 중증장애인이지만 남들보다 더 부지런히 뛰었다.
    내 사업에 자신감이 생기자 다른 장애인들도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음을 돌아보게 되었다. 저들도 누군가 손을 내밀어 준다면 사회 참여하여 일꾼이 될 수 있음을 믿고 있었다. 그래서 직업재활시설을 꿈꾸었다. 그 당시 제주지역에 등록 지체장애인이 3천여명이었는데, 경제적으로 유복한 장애인 1,000명과 중증장애 혹은 학업의 길 등 직업재활을 선택하지 않을 장애인 1,000명을 제외한 1,000명의 장애인에게 직업재활의 기회가 제공될 수 있도록 하자라는 큰 그림을 그렸다. 10개의 직종에서 10명의 장애인에게 기술을 가르친 후 제주지역 10개의 읍 면에 보내어 그곳에서 다시 장애인을 가르치도록 시스템을 갖추고 돕는다면 제주지역 1,000명의 장애인이 직업재활에 성공하여 지역사회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초석으로 춘강 장애인 근로 센터를 설립하였다.

    춘강 장애인 근로 센터는 토지와 건축 그리고 기계장비 구입까지 모든 비용을 정부 지원 없이 제 사재로 충당하여 시작한 시설이다. 장애로 인한 아픔은 하나라고 생각했기에 정부의 지원이 없다고 마냥 생각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내 삶의 화두가 ‘어떻게 살지?’였기에 장애인과 그 부모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해주는 것이 나의 평생 명제를 푸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법인은 직업재활, 의료재활, 사회재활의 전인적 서비스 체계를 갖춘 복지법인으로 운영해 오고 있다.
    Q : 남을 돕는 일에 활동기간이 오래되었다, 활동을 꾸준히 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가?
    가장 큰 힘은 가족이다. 춘강을 설립하며 부지 6,800평과 건축비용으로 4억 상당의 현금을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금전적 출현을 할 때마다 주저하지 않고 언제나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해주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어머님과 아내, 아버지의 결정이 옳다고 지지해주는 아이들에게 언제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다.
    두 번째는 함께하는 직원들과 장애인들이 나의 힘의 원천이다. 저희 법인에는 30년 가까이 근무한 직원들이 여럿 있다. 대부분이 십 년 이상 장기근속을 한다. 장애인분들도 마찬가지이다. 직업재활시설인 춘강 장애인 근로 센터에는 20년 이상 근무한 장애인분들이 나와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다.
    그분들이 장애를 극복하여 일을 배워 나가고, 집 장만을 하고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것을 보는 기쁨이 내 힘의 원천이다.

    Q : 사회 활동을 하며 가장 인상 깊었던 일화는 무엇인가?
    제주도 장애인 종합 복지 관장을 겸직하고 있을 때였다. 부모 상담 중에 서귀포시 거주하시는 어머님의 하소연을 듣게 되었다. 며느리 하나 잘못 들였더니 병신 자식 낳은 것도 모자라 밭일 내팽개쳐 두고 아기 둘러 업고 복지관에만 가서 사니 집안 거덜 나게 생겼다며 시부모님이 역정을 내신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1997년 IMF가 시작되자, 더 미루면 기증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형편이 될지 모른다는 우리 가족의 합의로 토지를 2,000평 구매하여 서귀포복지관 건립 조건으로 1,000평을 서귀포시에 무상 증여하고 그 옆에 직업재활시설을 개원하여 장애인 자립의 기반을 마련하였던 일이 떠오른다. 그때, 직원들이 사업도 어려운데 어떻게 버티려고 하느냐며 만류도 많이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용기를 낸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Q : APA 수상 이후 변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APA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기뻤던 것은 이 상이 비영리활동가 100인이 모여 준 상이라는 점이었다. 나에게는 가족이 있고 함께 해준 직원들과 장애인 가족들이 있었지만, 사회복지의 길은 언제나 외로운 길이었다. 수상식장에서 많은 분을 뵈며, 좋은 벗들이 많아졌다는 든든함을 느끼곤 했다. 지금은 함께 사회복지를 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비영리 활동가분들을 지지해드려야 하나 하는 생각이 많아졌다.

    Q : APA는 어떤 의미 인가?
    이제 70을 바라보는 나이이다. 하지만 나 자신이 현장 활동가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나와 같이 장애를 가진 분들과 함께 건강한 미래를 향하여 사회 속으로 오늘도 걸어가고 있다. 나에게 APA 수상은 그 사명을 알고 끝까지 현장 활동가로 제 자리를 지켜내야 겠다는 굳센 다짐의 디딤돌이 되었다.

    Q : 마지막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
    한글을 어머님한테서 배웠는데, 불심이 돈독한 어머님 영향으로 글을 깨치고 처음 읽은 글이 회심곡이었다. 어릴 적, 그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겠지만 그 구절구절들이 제 머리 속에 새겨져 있는 것 같다. 태어난 것이 부처님의 은덕이고 부모님의 은혜라는 글귀는 중증장애의 몸이지만 나 자신을 폄하하거나 비관하지 않고 늘 감사함을 품게 하였고, 효와 가족사랑 그리고 소외된 이웃을 도와주면 복을 받는다는 내용은 온전히 내 삶에 채색되었다.
    무엇보다 항상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앞장서셨던 어머님의 삶을 지켜보며 자랐기에, 어머님의 교육 철학이셨던 ‘항상 남을 기쁘고 이롭게 하는 일을 하자’는 나의 신념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사회복지사업은 물론 개인 사업을 하면서도 행함의 기준점이 되어 왔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나의 하루하루도 힘들고 어려움이 많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와 뒤돌아보니 국가와 모든 분께 감사할 뿐이다. 여러분의 오늘도 힘드실 거다.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처하더라도 비관하지 말고 용기를 내시라. 작은 것에 항상 감사하고 극기의 노력을 가한다면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다. 혹여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감사와 노력만으로도 여러분은 어느새 APA 수상자이다.
    감사합니다.
  • 김하종
    “저는 사제복 대신 앞치마를 둘렀을 때, 가장 낮은 곳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 잘 보입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길 위의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할 수 있음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26년째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APA 상 받고 와서도 똑같이 일했다. 안나의 집 와서 식사 준비하고, 같이 밥 먹고, 뒷정리하고. ‘신부님 참 변함없이 살아왔다’는 얘기 듣고 싶다.” 아침 5시 기상, 아침 기도, 식사 준비, 뒷정리, 행정일, 오후 5시 아지트 활동. 그는 매일 반복 되는 자신의 일상을 “인간으로는 참 재미없는 인생”이라고 평가했다. 오후 2시, 성남 안나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한참 급식소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신부의 상징인 사제복 대신 평상복을 입은 그의 모습에서 인생의 재미보다 찾기 힘든 인생의 ‘의미’가 담겨있는 듯 했다. “사실 상을 준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되게 놀랐다. 나는 그냥 주방일 하는 사람이다. 전혀 훌륭하거나 특별하지 않다.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매일 주방에서 일한다.”

    APA 수상은 저한테 어떤 증표 같았다. 저도 사람이다 보니 ‘이 생활이 의미가 있을까’ 싶을 때도 많다. 가는 길이 맞다고 인정받은 기분이다. “예수님께서 ‘잘하고 있다’고 해주신 것 같다.” 다행히 후원도 많이 늘었다. 안나의 집은 정부보조금 40%, 후원금 60%으로 운영된다. APA 수상 이후 후원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믿을 수 있는 곳이라는 인식이 생긴 덕분이라고 했다. 최근에는 시민들이 십시일반 모아준 후원금만으로 건물을 지었다. 곧 계약이 만료되는 안나의 집이 이사 갈 보금자리다.
    원동력은 ‘목표’가 아닌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사랑’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30살에 사제가 될 때까지 이탈리아에서 살았다. 학부 시절 동양철학을 배웠던 그에게 선교사들의 도움 없이 가톨릭 신자들이 생겼던 한국이란 나라는 꽤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1991년, ‘달동네’였던 성남에 정착하게 됐다.
    김 신부는 “달동네를 보는데,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라는 느낌이 왔다”고 상기했다. 그렇게 독거노인을 위한 무료 급식소인 ‘평화의 집’을 운영했다. 저녁에는 공부도 가르쳤다. ‘영어를 가르쳐 달라’던 아이가 한 명, 두 명 늘어 1994년에는 분당 영구임대아파트에 아예 공부방도 열었다. 그러다
    1997년 IMF가 터졌다.

    “그때 노숙자들이 진짜 많았다. 근데 밥 주는 곳이 없었다. 독거노인 급식소는 원칙적으로 못 들어가니까. 서울역에서 노숙자들 밥 주긴 했다. 근데 전혀 인간답지 않았다. 냉면 그릇에 밥, 국, 반찬... 아저씨들 창피해서 벽 바라보면서 숨어서 먹고 그랬다. 앉지도 못하고, 밖에서.”
    그렇게 그는 6년 간 운영한 평화의 집을 정리하고 노숙인들을 위한 급식소인 ‘안나의 집’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결정이었다. 김 신부는 “정말 급한 상황이고, 어려운 상황이었다”며
    “그저 인간답게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결정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 결정에 목적은 없었다.

    그저 위대한 존재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밖에는.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한다. 나라도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데, 내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나? 예수님이 나한테 맡기신 사랑하는 일, 그걸 실천하는 거다.”
    받아봐야 줄 수 있다 … 무엇이든
    안나의 집이 자리를 잡아갈 무렵, 한 달에 한번 일찍 일어나 샌드위치와 우유를 챙겨 노숙인을 직접 방문하러 다녔다. ‘가출’이라는 단어도 몰랐던 때, 우연히 가출청소년을 만났다. “1998년, 수지 지하상가에서 15살짜리 애들 3명을 만났어요. 밥 먹었냐고 물어보니까 안 먹었다는 거다. 그래서 안나의 집에 밥먹으러 왔다. 처음엔 애들한테 밥을 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어느 날 다 먹고 ‘잘가’라고 인사를 하는데,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다시 춥고, 어둡고, 위험한 길로 돌아갈 거 아니냐.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청소년을 위한 자립관을 만들게 됐다.” 독거노인에서 노숙자를 위해, 노숙자에서 가출청소년을 위해. 이 모든 일은 계획한 게 아니었다. 김 신부는 “어려운 사람과 같이 울면서, 보고 느껴 시작한 일들”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그가 느낀 건 그저 ‘동정심’이 아니다. “사랑 받아 봤기 때문에 사랑할 줄 알고, 용서 받아 봤기 때문에 용서할 줄 안다. 나는 사랑도 많이 받아봤고, 많이 얻어서 교육도 받을 수 있었다. 먼저 받았기 때문에 주는 거다.” 김 신부는 자신의 인생에서 진정한 필란트로피의 의미를 찾았던 것이다.
    ‘나부터 행동하는 것’
    “우리 인생은 매일 매일 살면서 만들어가는 거다. 내가 살면서, 노력하면서, 사람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매일이 바뀔 수 있는 거다. 매일 새로운 시기가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당장이라도 필요하다면 내일이라도 나는 북한에 갈 거다. 누군가 해주길 바라면 안 된다. 나부터 시작하라.”
  • Nomura Motoyuki
    “청계천을 중심으로 그곳에 모여든 하층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로부터 귀중한 인생을 사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덕분에 나의 인생은 부유했습니다.”
    부모님은 일본이 군국주의화하고 있었을 때부터 사회적 기독교 운동(social gospel movement)의 초기 운동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에서는 불온한 인물을 감시하고 단속하는 특별 고등경찰이 있었는데, 마치 한국의 박정희 군사 독재 정부의 KCIA(남산)과 같이 무서운 조직이었다. 일본 권력가에서는 부모님이 위험한 인물이었다. 전쟁중에도 나는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도시샤 대학(Doshisha Univ.)과 시인 윤동주와 친한 교제가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에 이끌려 윤동주의 시타쥬쿠에 갔던 적이 있었다.
    내가 자란 쿄토시내의 니시진 Nishijin 지구에는 조선인 하층 노동자 가족들이 대부분 이었다. 차별받고 박해받으며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던 조선인 하층 노동자 가족과 그들을 조롱하고 차별하고 멸시하는 일본인을 나는 어릴 때부터 보고 자라고, ‘Something must be wrong !’ 이라는 의식을 갖고 바라보았다. 조선인 여자 아이들은 대부분 초등학교에 가지 않았다. 조선인 남자 아이 두 명이 나와 6년간 같은 초등학교 같은 반에 있었다. 그들이 차별받고 부당하게 취급되는 것을 보면서 어린 나 나름대로 의분을 느끼고 있었다. 도쿄 수의 축산 대학에 입학했을 때 한국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1년째가 되었다.
    광주 근처 출신의 김옥남이라는 유학생이 재학중이었는데, 고향으로부터 송금이 끊어져 생활이 곤란하였다. 그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하숙집을 구하는 일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일본도 경제적으로 좋지 않았다. 배급미와 의료품을 김옥남과 나누고 아르바이트 일자리도 찾아 둘이 함께 살았다. 1953년~61년까지 나는 몹시 가난한 유학생으로서 미국에서 세 개의 신학교와 대학원에서 접시닦이를 하면서 다녔다. 유학 당시 나를 Jap 과 차별적인 용어로 불리며 모욕적인 취급을 받았다.
    이러한 경험은 일본에서 목격한 한국인의 차별과 부당함에 대한 나의 어릴 적 체험과 겹쳐져 귀국 후에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사죄와 용서를 구하는 인생을 보내야겠다고 결의했다.

    그러한 목적으로 1968년에 처음 한국을 방문했고, 1973년에는 가족 전원을 동반해 한국을 방문했다. 도시 산업 선교회의 소개로 청계천을 방문했는데 그곳에 봉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리에 제정구씨도 함께 있었다. 청계천 빈민촌을 위해 필요로 한 자금을 확보C하기 위해 도쿄도내의 주택지를 매각하였고 현재의 한촌 벽지의 원생림에서 살게 되었다.
    미국의 신학교나 교회에서 배울 수 없었던 귀중한 인생을 사는 귀중한 방법을 한국의 청계천을 중심으로 그곳에 모여든 각지의 농어촌과 대도시에서 하층의 삶을 살아 온 사람들로부터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나의 인생은 부유했다.
    연지동에 있는 여성 전도 봉사회의 일부인 약자 구원 선교 봉사회의 기초를 만들어, 매일 2천명의 미취학아동에게 20년간 급식을 주도록 도왔다. 이를 위해 혼자 독일로 건너가 독일 교회의 원조를 얻고, 급식과 유아 교육 시스템의 기초를 확립할 수 있던 것은 나에게는 너무나도 감사해야 할 봉사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 김도현
    “제 꿈은 사랑과 돌봄이 필요하지 않은 사회가 되어 뿌리의 집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베푸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랑을 받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가능한 적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입양의 본질은 결국 ‘이별과 상실’
    “스위스에서 한 해외입양인을 만났다. 입양 가정에서 사랑도 많이 받았고, 나름 성공도 거둔 사람이 불쑥 “입양의 본질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묻더라. 우물쭈물하는데 자기는 “이별과 상실”이라고 생각한다더라. 우리들이 입양에 대해서 “사랑과 돌봄”을 얘기할 때, 사실 입양인들은 가장 처음 느꼈던 감정인 이별과 상실을 계속 안고 살아간다는 거다. 일상 속에서도, 인생 속에서도 일종의 분열이 있는 셈이다. 뿌리의 집은 입양인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메꾸고자 부모님을 찾는 여정에 동행하고, 낯선 타지에서 그들에게 환대의 경험을 주는 역할을 한다.”
    1년 동안 뿌리의 집을 거쳐가는 사람 수, 약 300명. 머문 날 약 3,000박. 그들이 머무는 날이면 김도현 목사 부부는 분주해진다. 따뜻한 아침을 챙겨주고, 그들이 머무는 공간을 깨끗이 정돈하는 것은 기본이다. 더 나아가 그들의 삶에 깃든 애환을 마음으로 함께하는 나날을 살아가고 있다. 가족 찾기 여정이나 국내에 다시 정착하려는 사람을 뒷바라지 해주는 일, 통역이나 번역, 한국사회나 문화에 대한 안내 등이 그 ‘서비스’에 해당한다. 이렇게 뿌리의 집에는 여러 사람들의 경험이 흘러 들어오게 된다.
    “하루는 입양인들이 저녁 식사를 하면서 둘러앉았다. 그날 부모를 만나고 돌아온 입양인이 말하기 시작했다.” 내 어머니는 나를 키우려고 일주일 동안 온 힘을 다했는데, 어쩔 수 없이 날 입양 보낸 거래. 낳아준 어머니에게 너무 고마워. 그리고 오늘은 너무 좋은 날이야“라면서 펑펑 우는 거다. 그 눈물로 조금이나마 치유가 되는 거겠지. 그런데 다른 입양인은 부모님을 못 만났다. 부모가 자신을 만나는 걸 원치 않았거든. 그렇게 되면 굉장히 무너진다. 버려짐을 당한 사람으로서의 비참히 떠오르는 거겠지. 이러면 계속 그 아픔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는 거다.”
    시스템 앞에 고개 돌릴 수밖에 없었던 부모들
    비단 입양인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아니다. 김 목사는 해외입양인 가족모임 ‘민들레회’가 조직되는 일을 뒷바라지하여 입양인들과 입양을 보낸 부모들과의 만남도 주선하고 있다. 선택권이 너무나 적었던 원가족의 아픔 또한 치유하기 위해서다.

    김도현 목사는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해외입양 문제를 다룰 때 아이를 버려졌다는 측면에서 바라봤다”며 “이제는 친엄마의 상황에서 포기될 수 밖에 없었다는 측면에서도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입양인이 ‘이별’이라는 경험을 했다면, 친엄마들은 무슨 경험을 했을까에도 초점을 맞춰 볼 시점이라는 것이다. “민들레회에서 얘기를 나눠보면, 아이를 한번도 안아보지도 못하고 입양을 보냈다”는 엄마가 대부분이다. 양육이라는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 입양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거다. 양육을 선택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사회적인 압박 속에서, 양육의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진정한 인간으로서 한 여성의 결정, 선택, 욕구를 인정해주지도, 고려해주지도 않는 시스템인거다. 엄마의 의지나 진심은 물어보지도 않았던 거다.
    올바른 사회시스템은 한 개인이 선택과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지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들이 부재한 상황에서 내린 결정들은 지금까지도 엄마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이에 김 목사는 ‘엄마가 아이를 돌보는 기간을 보장해주자’는 흐름에서 아이를 낳고 적어도 한 달 정도는 함께 생활해 볼 수 있도록 입양 특례법 개정을 발의했다. 아이를 낳고 바로 입양을 보내는 것이 아닌, 한 달 동안 함께 생활해 보면서 자기 미래에 대한 의지와 자신의 자원을 점검해보고, 많은 상담을 통해 자기가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것이다. 결국 법은 개정 됐지만, 한 달이 아닌 일주일로 결정된 아쉬운 점이 존재한다.
    결국 내가 설 자리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김도현 목사에게 아시아 필란트로피 수상은 더욱 무거운 짐을 남겼다. 김도현 목사는 수상 당시 “아시아 필란트로피가 실수 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풀어가야 할 과제가 이렇게 많이 남았는데, 상을 받아도 되나? 싶었다.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밥상부터 차린 꼴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에겐 아직도 주어진 일이 많이 있다. 해외로 입양 보내어 지기 전, 아동이 그 나라의 시민권 발급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입양특례법을 개정했지만 이 법이 적용되기 이 전에 시민권을 받지 못한 입양인들도 다수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꿈은 사랑과 돌봄이 필요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 뿌리의 집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마더 테레사가 전 세계적으로 위대한 어머니가 됐는데, 사실 인도에 가난이라는 게 없었다면 그렇게 될 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사랑을 베푸는 것 보다 더 중요한건 사랑을 받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가능한 한 적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사회 전체가 좋아져서 사랑으로 돌보아야할 필요성이 없어지는 것이 나의 꿈이다.

    김 목사는 사회를 사랑한다. 규범과 제도가 부드러워진 사회. 규범, 제도와 법 속에 인간애가 깃들어 있는 사회. 김 목사는 ‘주변인의 보편성’으로 결국 그런 사회가 올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오히려 주류사회가 편파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편파성을 교정하는 건, 결국 주변인으로부터 온다. 주변인의 보편성이 발현될 때 주류 사회의 편파성이 제거된다. 주류사회가 가진 힘의 불의성에 대해 말하는 것, 이 과정을 정의의 실현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 노국자
    International cooperation and Poverty
    “아프리카에 있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어요. 물이 없어서 고통받는 그들에게 우물을 파서 꿈과 희망을 전할수만 있다면, 저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죠.”
    노국자 후원자가 실천해온 나눔 인생은 벌써 10년째이다.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래 전 우연히 방송에 소개된 아프리카 케냐의 한 마을에서 가뭄으로 인해 물이 부족해 죽어가던 아이를 보고 해외아동결연을 맺은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결연을 맺었던 아이에게서 “물을 긷기 위해 하루 15리를 걸어야 한다.”는 편지를 받고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우물을 파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노국자 후원자는 그렇게 소매를 걷어 붙였다. 아프리카에 우물을 파기 위한 작업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하지만 첫 우물을 판 후 물통을 들고 헤매는 아이들의 얼굴이 더욱 눈에 아른거렸다. 노국자 후원자의 마음은 더욱 다급해졌다고 한다. 고민 끝에 손수레를 직접 잡아들었다. 손수레를 끌고 헌 옷, 신문지, 빈 병 등을 주워 모았다. 폐품을 팔아 아프리카의 외딴 마을에 우물을 파주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 한 기자가 저에게 왜 이렇게 폐품을 모으냐고 물었어요. 물론 내 용돈으로도 할 수 있지만 더 많은 돈을 모아서 줄 수 있는 게 뭔가 생각하고 폐품을 줍는다니까 그걸 취재하던 기자가 우물 할머니라는 별명 을 붙여줬어요.” 이런 이야기를 계기로 KBS 아침 마당에도 출연하여 많은 할머니 후원자들이 생겼다.
    “쌈짓돈으로 10만원, 최고로 많은 사람은 300만원을 주면서 자기네들은 어떻게 하는지 방법을 몰랐는데 저를 통해서 후원할 수 있어 감사하다고 말했어요. 작지만 보탬이 되면 좋겠다며 할머니들이 후원에 동참했어요. 제가 그 할머니들의 모델이 된 거죠.”
    노국자 후원자는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나눔대사로 활동하며 사랑을 나누기 위한 일에 적극동참 중이다. 2006년 케냐를 시작으로 여러곳의 아프리카 지역을 방문 후에는 직접 홍보활동을 하며 수백 명의 이르는 후원자를 모집했다. 수백 통의 전화와 수천 통의 문자를 보내며 아프리카 우물 파는 일에 동참을 호소하며 아프리카에서 받은 희망을 나누고 있다.

    “제가 많은 우물 값을 모을 때 기본 원칙은 정직하고 투명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 돈은 제것이 아니잖아요. 그 땅의 아이들을 위해 쓰라고 준 돈이기 때문에 절대로 손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 아이들을 위해서 온전히 쓸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해요”
    노국자 후원자는 “순수한 아이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속이 뜨거워진다”며 “많은 크리스천들이 우리 아이들을 위한 사랑 나눔에 적극 동참해 주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그리고 “우물파는 일, 하늘나라 갈 때까지 하겠다”고 전하였다. “후에 재정적으로 복을 주시면 아시아에도 우물 파겠다"며 아이 같은 웃음을 내보였다. 어딜 가든 아프리카 이야기를 입에 달고 다닌다는 노국자 후원자. 후원자의 이런 나누는 삶에는 가족들도 한 몫 하고 있다고 한다. 매번 아프리카를 방문할 때마다 비행기 값을 대주는 딸은 든든한 동역자이자 후원자이고, 남편은 우물 할머니의 지지자이다. 올해도 노국자 후원자는 아프리카에 우물을 팔 후원금을 모으고 있다고 한다. 내년이면 또 한 마을에도 후원자의 귀한 선물이 생길 듯하다.
    꼭 워렌 버핏, 빌게이츠 처럼 돈이 많은 사람만이 기부왕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돈이 많지 않아도 사람을 향한 따뜻한 마음과 열정이 있다면, 노국자 후원자와 같이 아시아의 기부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은퇴는 있을 수 없다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ing 하겠다고 말하는 후원자의 따뜻하면서도 뜨거운 마음과 용기가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감동이 되고 있다.